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수구 전투 (문단 편집) == 시기의 모호함 == 그런데 왜 위의 내용들이 시기별 전투가 아니고 일화들에 정리되어 있을까? 이유는 이 기록들이 모두 시기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유수구에서의 전투는 오주전과 무제기에 모두 여러 번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장수들의 열전에는 연도가 안 나와있어 언제의 유수구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치통감에 실린 내용이면 그때의 일로 기록을 할 수 있지만 자치통감에 없는 내용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동습, 서성의 경우로 유수에서의 기록이 있으나 딱히 언제의 기록인지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없다. 동습의 경우 마지막 기록이 208년 [[황조]] 격퇴이고, 서성의 경우는 황조의 아들 [[황역]]을 물리친 것이 바로 전 기록, 그 후 기록은 221년에 손권이 오왕으로 임명되기 전이다. 즉, 범위를 열전으로 잡기에는 도움이 전혀 안 된다. 다만 장패와 장료의 일화에서도 악천후가 있기에 동습과 서성도 이때의 기록이 아닐까?하며 의심을 가지는 정도. 주연 역시 219년 전의 일이라는 것만 나왔기에 도움이 안 된다. 손교와 손유의 경우는 두 가지 기록이 모두 손유가 죽기 전인 215년 전이라는 것이 끝. 주태 또한 남군에서 208년 [[조인]]을 공격한 뒤의 일이고 222년 전의 일이라는 것밖에 알려져있지 않다. 손관의 경우도 두 번 유수에 참가했다는 것이 전부일 뿐 시기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장패의 경우는 장패전에는 언제인지 나와있지 않으나 뒤의 하후돈과 거소의 방어를 맡았다는 것을 통해 무제기, 하후돈전을 비교해보면 217년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여몽의 경우는 지켰다는 것은 214년 5월에 있던 환성 전투 전에 유수구 전투가 있기 때문에 213년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노를 설치해서 싸웠다는 기록은 215년의 합비 전투 뒤니 217년의 일이 된다. 장흠의 경우 215년 합비 전투 이후 유수독으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중앙으로 돌아온 이후 여몽과 함께 유수에서 조조를 공격했는 것에서 217년의 일이 확실하다. 한편 216년의 일인지 219년의 기록인지는 알수 없으나 손권은 [[서상]]을 보내 항복을 하겠다고 하는데 여기서 표를 올려 신하를 칭하고 천명에 관해 진술한다. 즉, 조조에게 천자가 되라는 것. 조조는 이를 보고 >이 아이가 나를 화로 위에 앉히려 하는구나! 라고 하지만 사마의가 여기에 대해 몇 마디 해주자 결국 손권의 항복을 받아 서로 우의 관계를 맺고 혼인 관계를 맺기로 했다. 손권이 항복하면서 조조한테 황제에 오르라고 한 기록은 삼국지 무제기 주석 위략에는 219년 관우를 잡은 후의 일로 기록되었으며 진서 선제기(사마의)는 유수구 전투 후의 기록으로 하고 있다. 자치통감은 이 일을 관우를 잡은 다음의 기록으로 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